정유재란(丁酉再亂)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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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丁酉再亂)을 잊지 말자

    

“아니, 군선들이 저렇게...마치 물새들처럼...”

쓰시마(對馬)의 이즈하라(嚴原)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서 젊은 시녀 '모니카'가 함성을 질렀다.

<표면에다 푸른 천을 깔아놓은 듯한 잔잔한 아침 바다에 흰 돛을 펄럭이며 크고 작은 무수한 배들이 가물거리는 수평선을 향해 일제히 항진하고 있었다. 1597년 1월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명령으로 다시 조선을 향해 떠나는 여러 번(藩)의 배였다.>

“가엾게도 또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모리 노리코(森禮子, 1928-2014)가 소설 <성녀 줄리아>에서 정유재란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다. 420년 전의 정유년 1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군대가 부산의 다대포에 상륙해서 양산을 함락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쳤다. 경쟁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전년도 12월 앞서서 상륙한 상태였다.

작가는 소설에서 '군선들이 물새들처럼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당시 일본군의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14만 1,500명의 대군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세는 임진왜란에 비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고령에서 패하고 직산 전투에서도 패해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순천·울산 등지의 남해안에 머물렀다. 그들은 남해안에서 성(城) 쌓는 일에 열중했다. 그때 축조된 왜성(倭城)들이 순천·울산·서생포 등지에 남아 있다.

정유재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군은 총퇴각을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퇴각하고, 순천에서 진을 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도 퇴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를 저지하고 나섰다. 부랴부랴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니시의 사위 쓰시마의 소요시토시 등이 500여 척의 배를 동원해서 고니시를 지원했다. 한바탕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 200여 척을 격파하면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안타깝게도 최후를 맞았다. 장렬하게.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해 조선은 수많은 인명을 잃었음은 물론 국토가 황폐화됐을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 있어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처럼 전쟁은  일단 발발(勃發)하면 인적·물적 손실이 심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이러한 참담한 전쟁의 조짐들이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3일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에 따라 “북한을 아주 강력하게 다룰 것이다”고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북한이 추가 도발하면 중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올해가 바로 정유년(丁酉年)이다. 사람들은 ‘붉은 닭의 해’라며 새로운 기운을 기대한다. 하지만, 연초부터 붉은 닭이 비실시실 맥을 못춘다.

420년 전 정유재란이 ‘먼 옛날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일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자 다가올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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