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백승욱의 <생각하는 마르크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책/학술

    백승욱의 <생각하는 마르크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마르크스의 저술은 처음부터 전체적인 조망 아래 기획된 완성된 프로젝트의 산물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끊임없는 자기비판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저술들은 서로 심한 단층이 존재하는 심지어 모순적인 것이고, 미완의 것이다. 처음부터 완성된 전체적인 시각이 있다고 전제하는 후학의 생각 자체가 무리한 것이다. 이음새를 찾아 맞춰나가면 하나의 말끔한 유기체가 구성되리라는 추단 자체도 마르크스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늘 변신하고, 항상 새로운 과제와 시련에 직면한다.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했는지만 암송하고 마르크스가 ‘어떻게’ 사유했는지를 모른다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자기 머리로, 자기 판단으로 변하는 현실에 대응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유 방식이다.

    <생각하는 마르크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는 입론인 ‘마르크스와 더불어 생각하기’ 장에서 ‘왜 마르크스식으로 사유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이야기한다. 그다음 ‘마르크스는 어떻게 자신의 사유 세계를 수립했는가’ 장에서는 ≪자본≫에 이르기 이전의 저작들을 통해 인식론적 단절의 함의를 살핀다. 그리고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은 ≪자본≫에 입문할 때 도움이 되는 상세한 설계도이다
    .
    책 중간의 깊이 읽기에 해당하는 두 개의 장 ‘숨겨진 자본주의 세계는 어떻게 드러나는가’와 ‘마르크스의 사유는 어떻게 확장되는가’는 마르크스가 수많은 난관을 ‘어떻게’ 돌파했는지를 다루면서 그의 사유 방식과 관계 설정 방법론을 여실히 보여준다.

    앞의 ‘더불어 생각하기’가 마르크스의 어깨에 올라 앉아 마르크스가 걸어간 방향을 따라가면서 사유를 키워가는 과정이었다면, 두 깊이 읽기는 마르크스의 어깨에서 이제 내려와 그가 마무리하지 못한 영역으로 조금 들어가보는 작업이다. 마르크스가 제기했지만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데 난점이 있던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루고, ‘정치의 개조’라는 질문을 좀 더 근본적으로 살폈다. 여기서는 마르크스의 사유를 확장하려 한 두 지성, 발리바르와 알튀세르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문제 설정과 사유까지 함께 논의된다.

    책 말미의 ‘인문, 마르크스에게 말걸기’ 장은 마르크스의 비판적 사유를 ‘인문’과 결합해 이해하려는 창구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제기한 ‘해방’의 지평을 ‘윤리 비판’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면서 마르크스에게 어떤 논의가 부재한지를 다른 인문적 장과 비교해 이야기한다.

    ≪자본≫의 서술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 시간대를 다루는 서술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시간성을 결합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자본≫ 1권 1편은 가치형태론을 다루는데, 가치형태론은 화폐라는 ‘거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거울은 청년 마르크스가 좋아했던 메타포이기도 하다. “거울 메타포의 핵심은 바로 거울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 시간이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시간, 운동과 역사가 없는 시간이다. 1권 ‘상품’ 장에서 거울을 통해 고정된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 이후에는 움직이는 시간성 속에서 ‘운동’을 준비하며 자본을 ‘역사’ 속으로 확장해 설명한다.

    그런데 운동하는 시간성이라도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다. 우리는 ‘되풀이’라는 말을 쓸 때 시간을 배제하는 큰 착각에 빠지기 쉬운데, 그것은 그 이면에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이 적절히 작동할 때만 지탱되는 것이다. 되풀이가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일임을 뒤늦게 아는 것은 그 관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되풀이를 깨는 좀 더 의외의 일이 발생하는 시간성을 상정할 필요가 생긴다. 마르크스는 되풀이를 깨는 갑작스러운 전환이나 변화에 대해서도 설명을 덧붙이려 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같은 움직이는 시간성이지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성이 하나 있고, 그와 달리 스토리가 반전되듯 기존 궤도를 벗어나 이탈하는 것처럼 보이는 또 하나의 변동의 시간성이 분기할 수 있다. 현실 속엔 그런 경우가 정말 발생한다.”

    두 움직이는 시간성 중 전자를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재생산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하고, 후자인 또 하나의 두드러진 변동의 시간성은 계급투쟁이라는 말과 결부해 설명한다. 그러나 “이 시간성만이 계급투쟁의 특권적 장소는 아니며, 재생산 영역도 사회적 적대와 투쟁에 이미 연루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만 마르크스는 이 두 번째 시간성의 역사적 변동의 특징을 그에 앞서 서술한 재생산의 논리로 환원해 설명될 수 없지만 또 그와 무관한 귀결로 가는 것도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계급투쟁이라는 측면을 더욱 부각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본≫을 읽을 때 적어도 세 가지 시간성을 만나게 된다.

    이 시간의 문은 정세에 관한 비유로 딱 어울려 보인다. 정해진 궤도에 따라 움직이며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지만 어딘가 개입할 수 있는 시간의 장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 장소는 일정한 방식으로 반복되지도 않고 똑같은 곳에 잠복해 있지도 않다. 지난번에 그렇게 싸워봐서 잘되었으니까 6개월 지난 지금 똑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싸워보면 과연 잘될까. 정세는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변수가 생기는 순간 그림은 이미 달라져 있다. 그 순간 세력 관계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즉 ‘생각하는 마르크스’의 과제는 역사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서 수행한 사유와 판단은 시간이 지나면 그 유효성이 상실될 수 있다. 상황은 유사해 보일지라도, 판단은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마르크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함유하며, 또 ‘정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